"나는 김밥이야"나는 김밥이야.바삭한 김 옷을 입고, 따뜻한 밥 이불을 덮은 채, 알록달록한 친구들을 품고 있지.단무지, 당근, 시금치, 계란,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불고기까지 함께 말려서 왔어.아침부터 분주한 김밥집에서 태어났어.따뜻한 밥이 등 위에 올라왔을 때, 나는 웃음이 나왔지.“으쓱으쓱! 오늘도 맛있는 하루가 되겠군!”곧이어 친구들이 하나둘 올라탔어.노란 단무지는 항상 씩씩하게 말하지.“우리는 언제나 함께니까 걱정하지 마!”주황빛 당근은 부끄러움이 많지만 늘 단단하지.시금치는 상큼한 향기로 우리에게 싱그러움을 더해줘.계란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모두를 감싸 안아.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불고기 형은 이렇게 말했어.“얘들아, 오늘은 내가 특별 출연이야! 든든하게 함께하자!”우리는 김이란 긴 담요로 함께..
바다를 그리워하는 돌고래와 강을 지키는 물소강줄기가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오후였다. 평화롭게 물풀을 뜯고 있던 물소 앞에, 잿빛 물살을 가르며 돌고래 한 마리가 조용히 다가왔다.“오늘 물살은 잔잔하구나, 물소야.”돌고래가 말을 건넸다.물소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돌고래를 바라보았다.“그래, 돌고래야. 봄비가 그친 후로 강이 한결 고요해졌지.”돌고래는 하늘을 올려다보듯 등을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이 강도 아름답고 고맙지만… 난 가끔 파도치는 바다가 그리워.”물소는 물속에서 발을 꺼내 강가의 풀을 우물거리며 말했다.“너의 선조는 저 먼 바다에서 이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지.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너는 강에서 태어났고, 이 물길을 집이라 부르지 않느냐?”돌고래는 잠시 침묵했다. 콧구멍에서 푸슉, 하고 물을 뿜..
“오늘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구나, 고마워.”“어...? 누구지? 방금... 말했어?”“나야. 매일 너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 커피잔. 사실 오래전부터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꿈꾸는 거 아니지? 커피잔이 말을 하다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데?”“널 지켜보다 보니 알겠더라. 너는 사랑을 믿지만, 조금은 겁도 내고 있지?”“…그럴지도.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했거든.”“혼자가 편한 건 이해해. 하지만 말이야, 너의 따뜻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또 다른 기쁨이야.”“그런 사람… 진짜 있을까?”“있지. 너처럼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된 누군가. 그 사람과 손을 잡고, 아침마다 나를 사이에 두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결혼하란 말이구나,..
종이봉투 속 작은 시장어두운 종이봉투 안, 하루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마주쳤다.마트 진열대를 떠나 서로 낯선 채로 이 작은 공간에 담긴 우리는, 곧 누군가의 식탁 위로 향하게 될 운명을 안고 있었다.“햇볕을 많이 봐서 그런가, 오늘따라 더 노랗지 않아?” 바나나가 살짝 몸을 구부리며 웃었다.“그건 자랑이야?” 양파가 투명한 망 속에서 투덜거렸다.“난 껍질을 몇 겹씩이나 입고 있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나를 자르면 운다고만 해.”“하지만 넌 요리의 시작이잖아.어느 집에서든 네 향기가 퍼지면, 가족들이 식탁 앞으로 모이게 되지.” 상추가 말을 보탰다.비닐 속에서도 초록빛이 싱그럽게 퍼졌다.“난 단지 간식이야.” 과자 봉지가 중얼거렸다.“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만, 금세 잊어버리지. 나보다 저 빨간 파프리카가 더 ..
이제는 놓아줄 때 살면서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부여잡고 산다.헤어진 사람의 말 한 마디, 지나간 기회의 그림자,하지 못한 선택,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그것들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때때로 후회와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조용히 붙든다.놓지 못한 마음은 무게가 된다.처음엔 손바닥만 했던 그것들이시간이 갈수록 어깨를 짓누르고,결국에는 삶 전체를 무겁게 만든다.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그리고 깊게 붙들고 살아가는 걸까.아마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 같아서,혹은 그 순간을 인정하면 내 마음의 일부가 사라질 것 같아서일 것이다.하지만 붙잡고 있는 것들이 모두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붙들고 있기 때문에 더 아프고, 더 지치고, 더 멀어진다.손에 쥐고 있어야만 했던 건, 어쩌면 기억이 아니라 용..
팥빙수 속에 녹아있는 여름의 기억 무더운 여름날, 가게 안 시원한 그늘에 앉아 팥빙수를 한 숟갈 떠먹는다.얼음이 혀끝에서 녹으며 달콤한 팥과 함께 흘러내릴 때, 그 맛은 단순한 디저트를 넘어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그 시절,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동네 재래시장을 자주 다녔다.고기집 앞에서 고소한 냄새를 맡고, 생선가게 앞에선 코를 찡그리며 웃었던 나.장보기가 끝나갈 즈음이면, 늘 작은 분식집에 들렀다.선풍기가 덜덜거리는 가게 안,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 엄마가 시켜주던 팥빙수.당시의 팥빙수는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았다.얇게 간 얼음 위에 고운 팥, 연유 한 줄, 그리고 떡 몇 알이 전부였다.하지만 그 단출함이 오히려 더 깊고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엄마는 늘 “천천히 먹어, 머리 띵해진다”라며 ..
생명을 품은 행성 지구에는 공기가 있다.그리고 물이 있다.그 단순하고도 놀라운 조건이, 지구를 특별하게 만든다.공기가 있으니 바람이 불고,물이 있으니 강과 바다가 생긴다.뜨거운 태양 아래 수증기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구름은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온다.이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자연은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고,그 리듬 속에서 생명은 숨을 쉬기 시작한다.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도,저 멀리 흐르는 강물 한 줄기도사실은 모두 생명의 일부다.햇빛이 비추고, 바람이 스치며, 비가 내리는 그 모든 자연현상 속에는생명을 살리고 키우는 정교한 이치가 숨어 있다.지구는 그렇게 수십억 년 동안자연이라는 위대한 과학과 예술을 반복해왔다.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도 여기에 있다.우리는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
“내가 너를 믿듯, 너도 나를 믿어줘” 전투기가 조종사에게 보내는 당부의 글나는 오늘 또 너의 손길 아래 깨어난다.금속의 심장을 두드리는 엔진음은 내 결의이며, 너의 숨결과 함께 고동치는 이 박동은 전장으로 향하는 우리의 맹세다.너는 나를 타고 하늘을 찢듯 날지만, 나는 너를 실어 푸른 허공을 가른다. 우리는 한 몸이다. 네가 두려움 속에 흔들리면 나 역시 흔들리고, 네가 결심한 그 순간에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날아간다.오늘은 공중전이다. 불꽃이 오가고, 숨소리마저 긴장으로 얼어붙는 곳.그래서 부탁이 있다.첫째, 적을 보기 전에 너 자신을 먼저 봐.공포는 총알보다 빠르고, 망설임은 조준보다 무겁다. 하지만 너는 수없이 나를 몰았고, 그 훈련의 땀방울은 오늘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둘째, 나의 숨결을..